칼럼
이번 여름에 본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이다. 멀지 않은 미래, 과학자들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시미언 플루’라는 바이러스가 인류 대부분을 멸종시켜 버린다. 그 가운데서 면역이 생겨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과 유인원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각각 생존 공동체를 꾸린다. 유인원들은 실험실에서 인간들의 치매 예방약을 투여 받다가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갖게 돼 집단 탈출한 무리들이다. 인간의 말까지 하게 된 이들의 절대 지도자는 무서운 카리스마를 가진 시저다.
살기 위해 먼저 공격한다는 논리
유인원들은 시저의 걸출한 리더십 아래 이상적인 에덴동산을 건설하고, 서로 힘을 모아 사냥하고 가족을 돌보면서 잘 살아갔다. 이들이 자신들을 학대했던 인간들이 준 상처를 잊어가고 있던 어느 날 사고가 터진다. 수력발전소를 재가동하려고 숲으로 온 소수의 인간들과 유인원들이 우연히 마주치면서 다시금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유인원들은 인간 문명의 힘을 알고 있고, 인간들도 전기나 물, 냉난방도 필요 없는 유인원들의 강인한 생존력을 두려워했다.
“거기는 인간들의 집이다. 여기는 유인원들의 집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인간들의 침입이 있은 직후 시저는 엄청난 유인원 대군을 몰고 인간들의 근거지 앞에 가서 무섭게 일갈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수력발전소의 전기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절박한 사정 때문에 쉽게 물러설 수 없다. 할 수 없이 인간들의 지도자 중에 하나인 말콤이 목숨을 걸고 시저에게로 찾아가서 어렵게 시저의 신뢰를 얻어 수력발전소 재가동의 허락을 받는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말콤의 친구인 또 다른 인간 지도자는 주 방위군의 무기고를 점거하여 유인원들과의 전쟁을 대비하고, 이를 파악한 시저의 부하 코바는 오히려 그 무기고를 급습하여 유인원들을 무장시킨다. 그 과정에서 코바는 자신의 지도자인 시저를 저격하여 치명상을 입힌다. 시저는 큰 충격을 받는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과는 달리 유인원들은 서로 절대 배신하지 않는 우월한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폭군인 인간 농장주를 쫓아내면 천국이 올 줄 알았는데, 쿠데타의 주역인 동물들은 서로에게 더 무서운 폭군이 되었다.
시저와 말콤은 서로 좋은 친구임을 확인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인간과 유인원이 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인정하며 헤어진다. 인간과 유인원 모두 각자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아이러니에 봉착한 것이다. “내가 상대를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내가 공격당한다”는 논리는 모든 전쟁의 발단이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도 그랬다. 오늘의 피해자가 내일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나치 독일에 의해 유럽 곳곳에서 게토지역에 갇히고 핍박당한 유대인들이 지금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들을 가두고 탄압하고 있다. 유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너무 어색한 변명 같다.
마음속 분노로부터 벗어나야
8·15광복을 통해 일본이 이 땅에서 물러난 후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우리는 서로 동족끼리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싸우는 한국전쟁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남과 북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며 “내가 긴장을 풀면 언제 너에게 당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8·15광복절을 맞아 진정한 해방은 눈에 보이는 정권의 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분노와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로마만 물러가면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의 나라는 이 땅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던 의미를 한 번 되새겨 보자.
한홍 새로운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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