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요즘 우리 사회는 갑(甲)의 횡포에 대한 을(乙)들의 무서운 반격이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항공기 안에서 승무원을 폭행했던 대기업 임원, 주차장 직원에게 폭언과 폭행을 휘둘렀던 중소기업 사장, 대통령의 방미 외교성과에 흙탕물을 끼얹은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스캔들 사건들. 이들은 모두 이제까지 짓눌려 왔던 을들의 분노가 SNS와 인터넷이라는 매개체들을 통해 폭발하며, 엄청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하루 이틀에 된 일도 아니고 한두 사람에게 국한된 일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드러난 일부 사회 지도층들의 횡포에 다들 분노하고 있지만, 실은 우리 속에도 다 잠재된 갑과 을이 공존하고 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보면 동물들이 힘을 합쳐서 폭군 농장주인을 쫓아내는데, 그 폭동을 주도했던 나폴레옹과 돼지들은 이전 주인보다 더 무서운 독재자가 되어 동물들을 탄압한다. 자신이 을이었을 때 갑의 횡포에 대해 한을 품었던 사람들일수록, 정작 자신이 갑의 위치에 가게 되면 더 무서운 갑이 된다. 음지가 변하여 양지 되고, 양지가 변하여 음지 될 때마다 우리는 “누구나 그 자리 가면 다 똑같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힘은 그토록 무섭게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이며, 문패만 바꿔 달았을 뿐 힘을 가진 갑의 전횡은 계속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갑의 횡포와 을의 분노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살다보면 우리보다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잘난 갑의 횡포에는 분노하면서 우리도 무의식적으로 우리보다 못한 을에게 주고 있는 상처는 잘 반성하지 못한다. 일류대 출신들의 오만함에 상처받았던 이류 대학 출신들은 자기도 삼류대학 출신들 앞에 가면 그 이상의 진상을 떨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 일본의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 이 땅에 와서 힘든 일들을 하는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우리는 얼마나 무시하고 차별하는가. 주한미군이 저지르는 범죄에는 불같이 분노하면서 동남아 국가들로 하여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하는 섹스관광 1위의 어글리 코리안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왜 반성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그 현장에서 베드로는 칼을 휘둘러 체포조 중 한 사람의 귀를 베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다시 꽂아 넣으라고 꾸짖으셨다. 무장한 체포조들에 비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절대적 을이었다. 베드로의 칼부림은 갑의 횡포에 대한 을의 정당한 반격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체포하러 온 군병들이 아닌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 후 2000년 동안 벌어진 기독교회사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었다. 그때는 비록 힘이 없어서 한 사람의 귀밖에 벨 수 없었지만, 수백년 뒤 중세기에 교회가 엄청난 권력을 가진 갑이 되었을 때는 베드로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교황들이 무모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중동의 수많은 을들을 학살하는 죄를 짓게 된다.예수의 섬김의 리더십 실천하길베드로가 칼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는 힘없는 을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보복하겠다는 한 맺힌 분노를 갖고 있었다는 애기다. 힘없는 을의 때에 상처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칼을 품고 있으면 나중에 힘이 생기면 자기도 잔혹한 갑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베드로에게 을의 때부터 칼을 버리고 살라고 하신 게 아니었을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완벽한 갑이시면서도 의심할 여지없는 을인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던 예수님의 모습. 우리 모두 그분의 섬김의 리더십을 다시금 깊이 묵상하자.한홍 (새로운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