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한홍] 레미제라블에서 느낀 감동
지난 연말 정말 오랜만에 엄청나게 좋은 영화를 봤다. 전 세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레미제라블’이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빅토르 위고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프랑스 국민작가 위고의 소설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만들어져 25년 동안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것을 이번에 할리우드가 엄청난 스케일의 영화로 만들어 냈는데, ‘사운드 오브 뮤직’과 ‘아마데우스’를 넘어서는 최고의 뮤지컬 영화가 될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주인공 장발장 이상으로 장발장을 끝까지 추적하는 경찰 자베르를 주목했다. 뮤지컬과 영화에서 그는 “나는 감옥에서 태어났다. 너와 같은 시궁창 출신”이라는 짧은 대사를 장발장에게 내뱉는다. 그러나 자베르는 역으로 악과 불법을 단죄하는 길을 선택하여 가차 없는 법의 수호자가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장발장·자베르
원래 위고는 한 인물에서 장발장과 자베르를 다 뽑아냈다고 한다. 아는 사람이 작은 경범죄로 억울하게 몇 년간 감옥살이를 한 뒤 출옥했는데, 그 후 정권이 바뀌면서 신설된 비밀경찰의 책임자가 되어서 이번에는 무자비하게 범죄자들을 징벌하는 존재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면서 장발장과 자베르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장발장과 자베르는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와 그의 형인 아버지의 큰아들과도 같다. 불공평한 사회정의 시스템의 피해자이긴 하지만 어쨌든 장발장은 죄를 지었고, 살기 위해 발버둥칠수록 더 인생은 수렁으로 빠져갔다. 그러나 탕자처럼 방황하던 그가 주교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앞에 회개하며 거듭난다. 죄인이었으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기에 180도 바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나 평생 원리원칙대로 올곧게 살아온 ‘집안의 탕자’ 자베르는 율법주의적 칼날로 장발장 같은 탕자 동생들을 단죄한다. 정의의 수호자라고 자처하지만, 늘 남을 정죄하기만 하다 보니 결코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고, 인간성이 메말라 가는데 본인만 모르고 있다. 자베르는 마지막에는 장발장의 파격적인 선의와 용서에 무릎 꿇고, 스스로 양심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다.
우리 안에 장발장과 자베르가 다 살아 있다. 전자는 드러난 죄인이요, 후자는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다. 전자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요, 후자는 이미 예수를 믿으면서도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은 기성 신자다. 교회는 좀 더 따뜻하게 장발장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면서 자베르들을 새롭게 하는 부흥의 불길을 일으켜야 한다.
또 한 가지, 위고는 증오로 가득 차 있던 장발장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은 존재로 주교를 설정했다. 이 주교는 민중을 보듬어 주는 실천적 종교인이다. 자신의 친절을 도둑질로 갚은 장발장을 다시 한번 용서하며 두 개의 은촛대를 선물로 준 주교. 그 짧고 간단한 사랑의 터치가 장발장이라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또 그를 통해 죽어가는 창녀 팡틴과 그의 딸 코제트, 연인 마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구원의 파급효과는 위대하다
당시 기독교는 기득권층과 야합한 부패와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지탄받고 있었는데, 위고는 어떻게 주교를 이렇게 감동적인 사랑의 존재로 묘사했을까. 그것은 교회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위고의 간절한 바람이요, 기도가 아니었을까. 프랑스 혁명 때처럼 오늘날도 여전히 불우한 이웃과 절망에 빠진 청년들이 우리 사회에 가득하다. 우리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은 과연 레미제라블의 주교처럼 그들에게 희망과 연민의 불빛이 되어줄 수 있을까.
한홍 새로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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